국제고
결전의 날을 고작 몇 개월 앞두고 완전히 뒤집혀버린 입시였다.
내신은 영어만 반영되질 않나, 인증제점수는 암시하는 것조차 조심스럽질 않나.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던 자기주도학습전형이었지만, 나는 분명 운이 좋았다. 전혀 ‘빡세지 않은’ 학교에서 영어내신 챙기기는 수월했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인증제점수는 더 이상 부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목표가 뚜렷했다. 나는 나의 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를 잘 표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유리한 점을 발판삼아, 나는 서울국제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수기를 쓰는 건 여러모로 어렵다. 내가 후배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 방법인지 전혀 모르는 탓이다. 어쩌면 선생님이나 교육관계자들이 이 글에서 잘못짚은 부분에 실소를 터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에게 고루 적용되는 ‘옳은 방법’만 골라놓자면 분량에서부터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러니 내년 입시에 성큼 다가 선 후배님들, 그냥 가볍게 받아들이고 골라서 참고했으면 한다. 이 글은 서울국제고등학교 4기 자기주도학습전형에서 합격한 이정민의 합격수기이다.
가벼운 팁으로 시작하자. 뭐든 빨리 시작하라. 학습계획서는 미리 쓰고, 퇴고는 틈 날 때마다 하고, 첨삭은 선생님을 붙들고서라도 최대한 많이 받아라. 학원에서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빠른 시작은 특히 중요할 것이다. 원서접수일을 겨우 몇일 앞두고서, 아직 미완성의 학습계획서를 붙들고 선생님을 찾아다니는 학생들 탓에 교무실이 얼마나 붐비는지 모른다. 대부분이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거나 흐릿한 목표 앞에 갈피를 못 잡던 우유부단한 이들이다.(나는 전자였다. 후회돼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맘때면 선생님도 첨삭해줄 시간이 없고 학생도 글을 수정할 짬이 없으니, 여유롭게 입시를 준비하려면 남들보다 빠른 시작을 하는 것이 좋다. 고작 2, 3주 전에 펜을 잡고 빨리 시작했다며 좋아하지 말고, 수개월 전부터 학습계획서 작성을 시작하라. 면접 준비도 마찬가지다. 예상 질문은 빨리 뽑고 빨리 답변하고 빨리 외워야 한다. 내가 입시 준비를 하며 가장 부러워했던 아이는 스펙이 빵빵한 아이가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아이였다. 시간이 정말 금이더라.
학습계획서에 대해 얘기해 보자. 꼭 알아두어야 할 것 첫째, 자신의 진로와 글의 내용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야한다. 학습계획서 1번 지원동기에서 진로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뒤, 2, 3, 4번에서 앞의 내용을 언급하며 연계시켰다. 작가가 꿈인 필자를 예로 들어보자. 1번에 서술한 나의 목표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사회문제를 다룬 글을 쓰고 이를 번역하여 해외에 출판하는 것’이다. 나는 2번에선 번역을 연습한 경험을 썼고, 3번에선 독거노인문제를 글로 다루게 된 이야기와 교내작문대회에서 교훈을 얻은 이야기를 썼다. 4번 역시 빈곤기아문제를 글로 다루어야할 필요성과 이를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나의 포부를 담아냈다. 전부 나의 진로와 연결되는 내용이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느낀점을 확장할 줄 알아야 하고, 어떤 점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캐치해야 한다. 그러나 억지를 부려가며 진로와 활동을 연결하는 것은 위험하다. 글 속에서 억지스러운 냄새가 날뿐더러, 진심이 아니라면 면접에서 허점을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선 자신의 목표에 충실해온 학생이 유리한 것 같다.
둘째, 겸손한 태도를 가져라. 우리는 학생이다. 학생은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아무리 인증제 점수가 높더라도 결국 배우는 입장이다. 자신이 거둔 성과를 멋지게 나열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한 사례가 더 의미 있다. 필자는 1번에선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2번에선 번역을 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3번에선 독거노인문제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4번에선 빈곤기아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문제를 극복한 경험과 노력을 서술했다. 너무 단점만 내세워서 감독관들에게 허술한 학생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수를 극복했다는 것은 실수의 한계를 넘었다는 것이요,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스스로 배울 점을 찾아내고 삶에 적용했다는 것이니 충분히 좋은 자기주도학습이 될 수 있다.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적당한 반성을 곁들인 학습계획서는 인성에 있어서도 플러스 점수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셋째, 최대한 많이 첨삭을 받아라. 첨삭은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의 글을 바라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대개 글을 쓰다보면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자연스럽게 읽히고 수정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남이 읽어보면 의문투성이다.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고, 글의 흐름이 어긋난 경우도 있다. 이런 요소를 골라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뿐이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에게 첨삭을 받는 것 역시 중요하다. 찔끔찔끔 수정되는 학습계획서를 한 사람에게만 자꾸 보여주면 그 사람도 글의 오점에 둔감해지게 된다. 또 글에 대한 배경지식이 쌓이게 되어, 학생에 대한 기본정보만을 알고 글을 읽는 감독관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평을 내릴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같은 글이라도 감상은 천차만별이기 마련이다. 되도록 많은 이들을 만족시키려면 그만큼 많은 의견을 듣는 수밖에 없으니, 선생님을 귀찮게 할 순 없다며 소심하게 구는 일은 없도록 하자.
작가지망생으로서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도 적어보고자 한다. 확신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글의 흐름 역시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대회가 아닌들 막 써서야 되겠는가? 잘 쓴 글이 튼튼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학습계획서를 쓰며 중요시해야하는 점에는 어떤 내용과 문장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 이 내용을 강조하려면 어떤 식으로 써야하는지, 자연스럽게 내용을 전환하려면 무슨 말을 써야 하는지, 글자수를 맞추려면 말을 어떻게 바꿔야 좋은지 등이 있다. 필자는 꿈이 작가인지라 꾸준히 글을 써왔고, 이것이 큰 도움이 되어 문맥이 매끄러운 학습계획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글쓰는 연습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하고, 언급한 요소들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몇 가지 노하우를 밝히자면, 자신이 시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서술해야 하는 등의 경우엔 나열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문체는 간결하되 비교적 긴 호흡의 문장을 쓰는 것이다. 단 자연스러운 호흡을 이루도록 적당한 위치를 찾아 사이사이에 짧은 문장을 집어넣어야 한다. 또, 문맥에 어울리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문장을 마구잡이로 뒤섞어보는 것이 좋다. 주어를 뒤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서술어를 앞으로 끄집어내기도 하고, 앞 뒤 문장에 변화를 주거나 일부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등 실험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퇴고할 땐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라. 다른 사람이 읽어주면 더 좋다. 읽다가 호흡이 부자연스럽거나 버벅거리며 막히는 곳이 바로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운이 좋았다. 밑바닥이 높은 상태였으니 위에 걸린 합격문과도 비교적 가까웠다. 그러나 이젠 내가 밑바닥이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뛰어난 아이들이 나를 밟고 내 위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나는 특별한 생활과 차별화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잡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온 것에게 감사한다. 이러한 전환점을 찍는 것을 목표로 공부해왔으니 그것을 이룬 지금은 더 바랄 게 없다. 앞으로의 행보에 더욱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준비를 할뿐이다. 내년 입시의 주인공이 될 후배님들도 기회를 잡는다는 마음으로 준비했으면 한다. 인생의 기회다. 잡고 싶어 안달 나시길.
쭉 훑어보고 나니 합격수기 보다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을 한 번 더 적어놓은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학습계획서 좀 고치라는 선생님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 학생들에게 말 잘 들어야할 이유를 납득시켜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이미 다른 것을 이루었다.